대단한 거 바라는 거 아니잖아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헤어질 결심, 존 오브 인터레스트, 이런 거 다 유명한 최근 영화 아닌가? 내가 뭐, 서사랑 연출 기묘하게 꼬아놓아서 자칭 타칭 시네필들이 침 튀겨가며 극찬하는 영화, 온라인 플랫폼에 제대로 유통도 안 되어서 어디 공립 도서관 가서 구석에 짱박혀 있는 거나 찾아봐야 하는 그런 영화, 무성이나 흑백 영화, 이름 발음하기도 어렵고 나이 든 유럽 감독 영화, 그런 거 얘기하자는 것도 아니고 이런 영화들마저 본 사람들이 별로 없다. 저 중에 단 한 편도 붙들고 얘기하기가 힘들다. 빅 쇼트,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캐빈 인 더 우즈, 가타카, 애스터로이드 시티, 버드맨, 퍼펙트 블루, 블레이드 러너, 문라이즈 킹덤, 이게 어디 가서 나 시네마 굉장히 잘 알아요 하고 당당히 들이밀 목록인 것도 아니다. 내가 영화를 깊게 파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심취하거나 많이 본 것도 아니다. 근데 여기까지 안 가고 저 위 첫 줄에서부터 보통 아무도 모른다.
음악? 내가 뭐 어디 이름 적어놓은 거 보면 알파벳에 요상한 기호 위아래로 냅다 붙어 있는 동구권 작곡가 곡을 들어? 아니면 이름 특이하고 세부 분류도 복잡해서 영문 위키피디아 뒤져봐야 하는 그런 장르를 듣기를 해? 사운드클라우드를 막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스포티파이에서 그냥 케이팝 많이 듣는다. 에스파, 뉴진스는 말할 것도 없고, 뭐, 내가 진짜 어디 이름이 희한한 걸로만 화제되거나 하는 그런 그룹 노래를 구태여 찾아 듣는 것도 아니다. 정정한다. 그렇게까지 들어도 봤는데 곡이 영 안 맞더라. 각설, 진짜 마이너하다고 해봐야 드림캐처, 카드, 레이디스 코드, 이 정도까지 들었던 거? 국내외 인디도 조금씩 찾아 듣긴 하는데 그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케이팝 음악과 산업에 대해 대강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거, 그런 대화도 어디 가서 하기가 그렇게 힘들다. 해본 적이 있기나 한지 모르겠다.
소설? 테드 창이 이렇게까지 아무도 모를 일이야? 아시모프, 딕, 어둠의 왼손이나 고도를 기다리며, 세일즈맨의 죽음, 뭐 러브크래프트, 거기까지 안 가도, 테드 창 선에서부터 다들 그냥 눈알 똥그랗게 치켜뜨고 희한한 작가 얘기를 다 하네 하면서 쳐다보고만 말 일이야?
게임? 내가 뭐 잇치를 막 찾아보기를 해, 독점작을 돌릴 콘솔이 있기를 해, 아니면 제작자 개인 웹사이트 찾아서 바이너리 따로 받아서 실행해야 하는 게임이나 에뮬레이터로 돌리는 고전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스팀에 입점해서 많이 팔린 게임들. 포탈 시리즈, 엑스컴 시리즈, 슬레이 더 스파이어, 발더스 게이트 3, 이거 하나 하나 다 그냥 비디오 게임의 역사 교과서를 쓴다면 반드시 들어갈 공전의 화제작들이다. 스탠리 패러블,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바이오쇼크 인피니트, 발할라, 수퍼리미널, 이디스 핀치의 유산, 어 숏 하이크, 모뉴먼트 밸리, 황금 우상 사건, 사실 이것들도 게임 딥하게 좋아하는 사람들 눈에는 싹 다 그냥 흔해빠진 메인스트림 게임일걸? 근데 거기까지 안 바라고 딱 정말 포탈 시리즈가 왜 위대한지 그 얘기도 어디 가서 못 한다니까, 게이머가 애시당초 극도로 적은 걸 고려해도.
난 잘 모르는 남들의 연애사나 이상형이 하등 궁금하지도 않고 사랑이란 그 어려운 녀석에 대한 그들의 의견도 전혀 듣고 싶지가 않다. 지금 연애 중인지, 마지막 연애는 언제고, 왜 헤어졌고, 얼마나 만났고, 추호도 필요가 없는 정보이다. 그들이 나의 것을 구태여 알려고 들지도 않아주면 좋겠다. 들어주면 나 연애시켜 줄 거야? 그럼 오케이인데 그럴 거 아니잖아. 그런데 이제 내 나이가 그런 소재가 필연적으로 나오고 마는 그런 나이 진입한 거야? 아니면 약간 남들 보기에는 그럴 게 뻔한 자리들만 어쩌다 보니 찾아다니고 있으면서 불평하는 셈인가? 난 아무튼 그런 자리에서의 연애 얘기는 지독하게 관심이 없고, 그 주제로 기어코 대화가 흐르면 드러눕거나 박차고 일어날 것도 아니지만서도, 알아서 혼자 시큰둥하니 듣고 있으면 꼭 불똥이 나에게까지 튀어온다는 것이 문제이다.
뭐뭐뭐 안 본 사람이 사랑을 알겠냐? 농담처럼 쓰이곤 하는 말이지만, 나의 가장 구석진 부분을 제하더라도 나랑 취향이 이렇게까지 겹치지 않는 흔한 보통의 사람들과 그렇게 막 관계나 행복이나 사랑과 이상이나 옳고 그름이나 인생 등지에 대해 대화가 통할 거라는 유별한 기대가 없다. 들어오는 거 사양하지도 않지만은 같은 까닭으로 소개팅도 기대가 안 된다. 연애란 게 보아하니 “걔는 진짜 세상이 가만두지 않는” 유형이 아니고서야 열심히 찾아다녀야 성사가 되곤 하던데, 난 로맨스를 적극적으로 갈구하지도 않거니와, 지난 30년을 돌이켜 보면 세상은 날 그냥 있는대로 졸라 가만히 둬주더라고. 꼭 무슨 영화를 보거나 무슨 음악을 들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사실 그렇게 가르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들은 물론이요 지극히 가까운 과거의 나조차 그 영역으로부터는 벗어나 있기도 해서, 방향이나 경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학부를 장장 9년에 걸려 졸업하기 전후로 나든 저쪽이든 피차 일하는 입장이 되고서 마음 맞는 오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 기묘한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서로 분야나 직무가 완전히 다른데도 업무 얘기를 하면 그렇게 죽이 맞는다. 방금 말한 그게 왜 어이가 없고 어째서 야마 도는 일인지 너무나 잘 이해가 된다. 그리고 예컨대 그게 얼마나 업계에 만연한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심정이, 전혀 모르는 분야의 처음 듣는 관행인데도, 심히 공감이 된다. 나도 저 친구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것과 비슷한 것들이 싫거나 좋았을 것이고, 반대로 저 친구가 내 자리에 있어도 나와 비슷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 친구들이 싹 다 나랑 같은 노래만 듣고 같은 영화만 보고 그랬을까? 같은 영화를 봤다고 치면 감상이 얼추 비슷할 사람들만 내가 꼭 친구를 삼았을까?
내가 근래에 영화에 관해서 들었던 얘기 중 가장 흥미로웠던 말 중 하나가 “그 작품을 좋아하는 분도 있군요”였다. 어쩌다 보니 한 번 만나고 만 사람이었는데 그 대사만으로도 퍽 궁금해지는 양반이었고 따라서 그리 된 것이 다소 애석한 심정이다. 그러니까 난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해서 알고 있더라도 뚜렷한 의견이 없는 사람보다는, 나랑 극명하게 다르더라도 확실한 생각이 있는 사람에게 훨씬 더 끌리고 흥미가 간다. 꼭 로맨틱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냥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 편이 호감이 생긴다. 아냐 모르냐의 문제도 따라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무언가를, 지금은 모르고 있더라도, 경험해본다면 설령 나랑 다른 방향이더라도 분명히 좋거나 싫어하게 될 그런 사람이 나는 좋다. 사고의 구조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 좋다. 나의 생각을 문장으로 빚어내어서, 주어와 목적어와 술어를 이리저리 뒤집고 갈아끼우다 보면 만들어지는 모양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 좋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심각하게 드물다. 과하게 드물다. 드물다는 걸 깨닫게 되면 울적해질 만큼 드물다. 내가 대단한 거 바라는 거 아니잖아? 저걸 다 만족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세상 모르겠고 관심도 없고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모두의 눈알들이 뎅그르르 굴러가는 그 풍경이 이제 꽤 지겨울 뿐이다. 난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은 크지 않다. 얼마 전에 술자리에서 표현하기로는, 10 중에 3이나 잘 쳐야 4 정도이다. 그냥 죽이 맞는 친구들이나 좀 더 있으면 좋겠다. 보다 잦으면 지금 생각에는 과할 거 같고, 서너 달이나 좀 지날까 싶으면 한 번씩 만나서 진탕 취해가지고 서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얘기 실컷 할 수 있는 친구. 그런데 그런 사람 하나를 찾기가 아주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꼴로 어렵다. 몇 없는 지금 나의 친구들이 그래서 더 고마운 심정이다. 십자슥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