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의 경계를 짓기
모 행사를 갔을 때의 일이다. 여러 이벤트가 꽤나 거리를 둔 채로 연달아 일어나고, 사이 사이의 시간도 빡빡한지라 내가 보고 싶은 걸 보려면 마구 걸어다녀야 하는 종류의 행사였다. 이 중 한 번은 꽤나 긴박한 걸음을 옮긴 끝에 결국 살짝 늦고야 말았다. 영상은 이미 상영되고 있고, “상영관의 혼잡을 최소화” 같은 목적으로 한번씩 사람을 모으고 나서야 들여보내주고 있었기 때문에 지각자가 어느 정도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정말 황당한 것은, 기껏 모여서 들어갔더니 넘어질까봐서 굳이 환한 라이트를 바닥에다 비춰주지를 않나(혼잡 +1) 소곤소곤이라곤 해도 안내 멘트를 치면서 오디오를 덮질 않나(+1) 한두 명씩 쪼개서 들여보내서 결국 큰 차이 없거나 오히려 더한(+1)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진행 측의 미숙이 천인공노할 수준이라 나와 그 자리의 모든 관객은 기분을 거나하게 잡쳐버리셨다. 사실 그렇진 않고 어떤 가설을 떠올리거나 혹은 어쩌면 어떤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거두절미하면 나는 우리 사회가 책임 사회라는 표현으로 축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위 일화에서 주최 측이 책임을 지고 나선 결과, 혼잡이 경감된 것이 맞을까? 알 수 없다. 대조군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라고도 못한다. 오히려 가중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게 아까도 말한 솔직한 감상이었다. 이런 사달이 벌어진 이유는? 노오력했지만 물리적인 한계 때문에?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행사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실은 그 광경이 대단히 짠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책임 사회이기 때문이다.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책임을 지냐의 문제인 곳이다. 뒤집어 말하면 누군가 책임을 진다면 문제를 해결하는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당 극장에서, 주최 측은 늦게 들어온 관객들을 그대로 들여보낸다면 아무것도 안 하고 뭐 했냐는 질책을 아주 높은 확률로 이전 행사에서 받은 적이 있거나 최소한 그럴 거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렇다 해서 조금 늦게 도착한 유료 관람객을 매몰차게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책임의 경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생색을 그 누구의 두 눈에도 선하게 도장 찍어둘 필요가 있다. 이 불편과 혼잡이 초래될 뻔할 뻔자의 상황을 방관하고만 있었다는 그 놈의 책임을 벗기 위해서라면, 사람들을 모아서 들여보내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것이 더한 혼돈을 불러오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회의를 하는데 그딴 고민이 제기된다?
“그래서 가만히 있자구요?”
“민원은 어쩌는데?”
“뭐 좋은 대안 좀 있으면 내봐.”
내가 써놓고 보기만 해도 벌써 피곤해져서 글을 이만 줄여야겠다. 비록 주관적 감상이 다분하게 들어간 일화를 가지고 이야기한 것이지만, 이 어떤 문제를 책임지는 것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우리 일상에서 굉장히, 어쩌면 가장, 무거운 숙제라는 것은 김치찌개와 청국장을 구분할 정도의 한국인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해결은 뒷전이고. 난 이거 졸라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