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엔드게임
글을 썼던 시점의 사정이고 블로그 업로드 시점과는 제법 간격이 있는 이야기지만, 한동안 체스 퍼즐에 상당히 몰두했었다.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그리고 그 와중에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등은 각설하고 오늘은 체스 퍼즐을 풀어나가던 도중 떠올라버린 섬뜩한 어떤 생각을 적어두고자 한다.
체스 퍼즐이란 기물을 정해진 대로 배치한 후 시작부터 끝까지 하는 온전한 대국과는 구분된다. 꼭 실제 경기의 일부일 필요는 없지만 실제 이루어진 또는 가상의 경기의 중간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퍼즐이 퍼즐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정답 즉 최선의 수가 정해져 있어야 한다. 확실하게 게임을 끝낼 수 있는 또는 유불리를 바꿀 정도로 결정적인 이점을 얻어낼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룩을 저 칸에 옮기면 상대 킹을 체크메이트로 밀어넣을 수 있지만, 다른 칸으로 움직이거나 다른 기물을 움직이는 등 아무튼 그게 아닌 다른 뭐라도 하면 게임이 단단히 골로 가버리는 어떤 상황은 체크메이트 퍼즐이 되는 셈이다. 체크메이트만 항상 목표인 것은 아니고 퀸 대 폰 등 나에게 크게 유리한 방식의 기물 교환이 목표일 수도 있으며, 최적의 한 수만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두 수, 세 수, 많게는 다섯 수 정도까지 이어서 정답을 찾아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사용하는 웹사이트의 특징은 해당 사이트에서 플레이어들 간에 벌어진 실제 경기로부터 퍼즐을 생성해낸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는 실전 감각과 비슷하게 풀 수 있다는 세간의 호평이 있다. 게임 전체를 배우는 것보다 아직은 퍼즐만 들입다 푸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나로서도 이건 소소한 흥미 요소이다. 상대 킹이 호위도 없이 한참 내 쪽으로 돌격해 있어서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가 싶은 때도 있었고, 기물들이 희한하게 모여 있는 모양이 눈에 띄거나, 상황이 까다로운 퍼즐을 만나면 해당 색을 플레이했던 사람을 괜히 원망하기도 한다. 내가 맡은 색은 백일 수도 있고 흑일 수도 있다. 실제 경기에서는 첫 수를 두는 백이 유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퍼즐의 세계에서 색깔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분명 정답이 있다는 사실만이 유의미하다.
색은 매번 다를 수 있지만 정답이 있다는 것 외에도 내가 푸는 퍼즐들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상대가 내 차례 바로 직전에 어떤 수를 두었는지 표시해준다는 것이다. 전황을 읽는 법도 아직 잘 모르고 기보를 꼼꼼하게 들여다 보는 편도 절대 아니지만, 적어도 몇몇 퍼즐에서는 흥미로운 한 사실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 수를 두면 결국 불리해지는 상황이며 (그야 그러니까 퍼즐로 출제가 됐을 것이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상대가 방금 선택해서 둔 그 수가, 그 선택이, 패배로 직결되는 길이었다는 것이다. 대단한 발견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를 수 있으며 실제로도 수시로 실수를 저지른다. 체스처럼 규칙과 승패가 정해져 있는 세상에서는 실수가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뿐이다. 그럼에도 비교적 쉬운 난이도의 퍼즐을 만났을 때, 그리고 상대가 방금 둔 수 때문에 승리의 길이 열렸다는 걸 알았을 때에는, 꼭 내가 그 상대를 실제로 이겨먹기라도 한 듯이 “푸하하 바보 녀석” 하는 생각이 들고 만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고 말았다.
체스는 비록 바둑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최강의 인간을 쉽게 이겨먹을 수 있는 인공지능이 등장하긴 했지만, 주어진 경우의 수가 굉장히 많은 게임이다. 모든 플레이어가 최선의 수를 둘 경우 결과를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음이 밝혀진 게임을 일컬어 해결된 게임(solved game)이라고 한다. 틱택토가 대표적인 예시로 두 사람이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한 틱택토 게임은 반드시 무승부로 끝난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어떠한 게임을 해결하기 위해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따져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체스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며 해결될 수 있는지 여부조차 불명확한 것은 그 경우의 수가 굉장히 많다는 것이 분명히 큰 몫을 할 것이다. 체스라는 게임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경우의 수가 적은 조건부터 한정하여 따져보는 것으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기물이 7개 이하인 모든 상황의 결과는 전부 계산되어 있고, 2024년 현재 8개인 경우가 계산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결코 빠른 속도는 아니다. 체스의 기물이 총 32개이며, 보드에 기물 하나가 추가될 때마다 경우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근시일 내에 하나씩 늘려가며 무식하게 때려맞추는 방법으로 체스가 해결될 일은 요원해 보인다.
그런데 내일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기술 대혁명이 일어나서 집집마다 양자 컴퓨터가 보급되고 수학 난제들도 순식간에 우수수 풀리고 체스도 결국 해결되어서 서로의 실수가 없다고 가정했을 때 결과가 뻔할 뻔 자가 되어버린다면 게임으로서의 체스는 멸망해서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선수들은 실직해서 거리에 나앉고 유망주들은 자신의 꼬여버린 앞날을 한탄하며 기계 문명을 전복시키기 위한 지하 비밀 조직에 가입해 화염병 만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할까? 아닐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먼저 체스가 해결된다고 한들 그 수순은 인간이 외울 만한 것이 아닐 것이다. 기물이 7개 이하인 경우의 수는 최적화를 거친 후에야 십수 TB에 달하는 용량에 저장되었다고 한다. TB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단위로 1TB는 대략 (디지털 단위가 어째서 정확하지 않은지는 간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다소 간의 사정이 있다) 1000GB에 해당하며, 따라서 10TB만 되어도 0 또는 1의 값을 갖는 비트(bit)가 80조 개가 있는 상황이다. 전체 기물 32개 중에 고작 7개까지가 이렇다. 대신에 머리가 무진장 좋으면 해결된 원리를 익히고 체화하면 되니까 외우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닐까? 축하합니다, 당신은 방금 체스 전략이라는 개념을 재발명했습니다. 그것은 전세계의 수많은 체스 선수들이 수백 년도 넘게 힘을 모아 해온 일이다. 아직 우리가 모르는 어떤 막강한 전략이 없을 거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이 정도면 웬만큼 해봤다고 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불패의 챔피언을 상상하는 것은 분명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만인이 인정하는 최고의 선수라도 지는 경기가 있는 만큼, 수백 년의 집단 연구를 뛰어넘을 체스 천재라는 가정은 비현실적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종합해서, 인간의 기억 능력과 추론 능력으로는 정답을 외우거나 받아들일 그릇이 못 될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우리는 체스에 정답이 있는지 아직 모른다. 그렇지만 아는 것은 있다. 이 도대체가 알 수 없어서 사람 미치게 만드는 체스라는 게임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오답은 있다는 사실이다.
체스 경기는 오프닝, 미들게임, 엔드게임의 수순으로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한다. 엔드게임에서는 서로의 기물이 적기 때문에 컴퓨터의 도움을 빌리지 않아도 일정 수준에 달한 플레이어라면 기계적으로 결과를 내다보고 착수할 수 있다고 한다. 반면에 오프닝은 정해진 것이 제일 없는 시기이므로 더 복잡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체스에 대한 인간의 집념은 대단해서 이미 써먹을 만한 오프닝에는 이름이 다 붙어 있다는 것이다. 동명의 넷플릭스 시리즈도 있는 퀸즈 갬빗, 사람의 이름을 딴 점에서 낭만이 터지는 루이 로페즈, 상대의 행동에 반응하지 않고 지 할 일만 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런던 시스템, 심지어는 상대를 도발하는 것 외에는 손해밖에 보는 것이 없는 봉클라우드 어택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뭐라도 할 수 있는 행동에는 전부 이름이 있다고 보면 된다. 어떤 오프닝을 둘 수 있는지는 온전히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가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따라 다른 특정 오프닝으로 바뀌어 버릴 수도 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은 웬만큼 바뀌는 것에도 무슨 무슨 배리에이션 해서 이름이 죄다 붙어 있다는 것이다. 체스가 비록 해결된 게임은 아닐지라도 게임의 첫 수부터 어느 정도까지 어지간히 말이 되는 수는 이름까지 정해져 있고, 각 수에 따른 흑과 백의 유불리도 어설프게나마 파악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용기를 내어 창의력을 발휘하면 체스 경찰이 달려와서 전통과 이론 위반에 관한 죄 운운하면서 잡아가는 것은 아니지만서도, 수준 차이가 현격하거나 둘 다 초보가 아닌 다음에야 자신만의 시그니처 무브를 만들겠답시고 까부는 것은 승리를 내던지는 행위나 다름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고작 네 수만에 자연스럽게 체크메이트를 당하는 스칼라즈 메이트는 입문자라면 누구나 겪어보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런 속도는 나도 어느 정도 합을 맞춰주어야 성립이 되는 만큼, 이는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택한 행동이 패배의 즉각적이면서 당연한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대표적인 예시일 것이다.
체스의 기물들은 저마다 다른 행마법을 가지고 있어서 할 수 있는 게 정해져 있다. 특히 게임의 승패를 결정하는 킹은 상대 기물의 공격 범위에 들어갈 수 없고, 어떠한 기물이 다른 곳으로 움직임으로써 자기가 가려주고 있던 킹을 상대 공격에 노출시키게 된다면 그 수는 규칙에 따라 금지된다. 이러니 행동에 있어 이미 많은 부분이 제약된다. 더더군다나 이 게임은 아주 오랜 역사를 거치며 연구되었으니, 어느 정도 체스를 둘 줄 아는 사람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수는 둘 리가 없다. 정해진 것으로부터 변주를 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승리를 위한 논리와 추론에 따르는 것이다. 쓰러질듯 피곤한 상태에서 억지로 두는 체스라고 해도 피곤하면 피곤한 사람이 자기 딴에 다 하는 생각이 있으니까 폰을 이리로 비숍을 저리로 움직이는 것이다. 근데 그런데도 그 중에는 명백한 오답이 있다. 체스판은 고작 8줄과 8칸이다. 기물은 고작 32개이다. 거기에는 규칙이라는 물리적 제약과 이론이라는 논리적 제약이 동작한다. 그런데도 오답이 있다. 할 법한 행동은 정해져 있다. 하지만, 왜 그 수를 두었는지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를 두꺼운 책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어떤 것은 오답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행동은 체스의 경우의 수가 우스워보일 정도로 다양할 것이다. 체스에서는 금지된 수(illegal move)가 있어서 죽었다 깨어나도 킹이 상대 퀸 코앞에 달려들 수 없지만, 현실에서는 경제 원리나 물리 법칙 등이 있을뿐 마음만 먹으면 터무니없는 짓거리를 얼마든지 다양하게 할 수 있다. 먹을 수 없는 버섯이란 이 세상에 없으며 어떤 버섯이건 한 번은 먹어볼 수 있다는 사실과 비슷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단 아무 버섯이나 주워먹지 않으며 대개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사고하고 행동하지만, 64칸의 정사각형 판 위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32개의 기물보다는 흔해빠진 한 명의 인간이 내리는 결정들이 더 복잡하고 다양하며 그 여파도 예상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체스라는 게임이 경우의 수가 그렇게 다양해서 예측하기 힘들며 두는 사람도 생각이 다 있는데도 어떤 것들은 꽤나 명백한 오답이라면, 인간 행동에 대해서 그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남들 다 하는대로 평범하게 살라는 둥 뭐 아니면 운명은 천상의 양탄자 위에 털실로 기록되어 있다는 둥 하는 얘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렇지만 내가 모월 모일에 어느 사이트에서 특정한 채용 공고를 보았다는 것이 파멸적인 결과로 물 흐르듯 이어지지 않으리라고 과연 어느 누가 확언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선의나 논리나 신념이나 의도나 무슨 좋은 것들을 들고 오더라도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은 애써 체스에 빗대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만, 체스로 생각하면 더욱 뚜렷하다.
하다 못해 내가 체스 퍼즐에 입문한 것이 이렇게 저렇게 해서 흘러가다가 결국 내가 남미 마약 카르텔에 납치되어 지하실에 감금된 채 서서히 시들어가는 결과로 이어진다 한들, 지금의 나로서는 “이야 이거 써놓고 보니까 제법 문학적인 아이러니네” 하는 실없는 감상을 남기거나 “전형적인 백 랭크 메이트에 당한 보스가 단단히 화가 났나보군” 같은 공상이나 할 뿐이지, 티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져주는 법을 벌써부터 궁리한다거나 수갑 푸는 법을 유튜브에 검색해서 몇 번이고 돌려보며 익혀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도 모르는 미래의 걱정으로 오늘의 일상을 망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가능성이나 떠오른 김에 돈도 안 들겠다 해둘 수 있는 일은 있다. 난감한 퍼즐을 풀 때 과거의 플레이어를 원망하듯이 오늘의 스스로를 원망하는 꼴이 되지 않도록 매일을 살되, 어렵게만 생각되는 상황에 마주했을 때를 위해 단 하나일지라도 상황을 일발역전시킬 만한 비장의 수를 찾는 마음가짐을 언제나 준비해둘 것. 뻔하고 모호한 이야기이지만 체스 퍼즐을 풀면서 나는 이것이 충분히 타당하다고 믿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