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과 재작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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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과 재작년을 넘기는 기념으로 적었던 짧은 글들을 연도: 원제목 형식의 소제목을 달아 블로그에도 남겨 본다.


2023: 한 해를 이번에도 정리한다는 것

올해는 어떻게들 지내셨나요? 저는 문득 경이로울 때가 생겼습니다. 우주적 차원에서 보면, 우리는 우연한 배열로 뭉쳐 자의식과 자기 복제 능력을 갖게 된 먼지 덩어리가 아닐까요. 그런 덩어리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이 가만 생각해보면 여간 신기할 데가 없습니다. 우리 눈에는 사실상 무한한 시간과 사실상 무한한 공간 중에서도 이곳에 태어나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은, 확률을 따지자면 말도 안 되게 적은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 웃고, 울고, 서로 이야기하고, 때로 다투고, 공감하거나, 어울리는 모든 일들이요.

이십대의 초입에서는 사람을 만나 결국 흩어지는 일들이 너무나도 괴롭고 아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헤어지는 일마저 아름답습니다. 만났기에 멀어지는 것이고, 멀어져서도 가끔 추억하다, 어느 날에 우연히든 의도해서든 만나게 되면 그만큼 즐거운 일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아름답게 추억하는 이들이 저를 괜찮은 사람으로 알아주고 있다는 것은 설사 확인하지 못하더라도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일까요.

우리는 영겁의 세월 동안 존재하지 않았다가,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듯 아주 짧은 수십 년을 잠깐 밝히고, 결국 다시 끝없는 비존재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그 찰나에서 모두가 위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인들도 밥을 먹고 잠을 잤으며, 웃고 떠들고 행복을 찾았으며, 아프고 괴롭거나 슬프거나 화를 냈다는 일이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그보다도 위안이 되는 것은 나와 같은 처지로 이 짧고도 긴 존재와 자의식의 형벌에 처해진 사람들이 나의 근처에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기회로 태어나 말도 안 되는 확률로 알게 된 우리가, 행복하게 여정을 이어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24: 별난 한 해를 넘기며 고합니다

친구에게 선물하고 연락하는 일은 언제라도 좋지요! 허나 아무때나 그러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상 속에서 갑작스레 친구가 떠오르는 일도 있겠지만, 별 계기 없이 그러기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좋은 마음이 생겨났다 한들 핑계 없이 선뜻 얼굴을 들이밀기에는 주저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럴 때 구세주 같이 등장하는 것이 생일이란 녀석입니다. 매년 한 번이라니 간격도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길지도 짧지도 않게, 서로의 연결을 상기시키는 데 제격입니다. 까먹었건 남사스럽건 왠지 어색하건, 어떻게든 챙기지 않고 지나가더라도 요즘 같은 유비쿼터스 세상에, 동네 사람들은 들으시게, 나 생일이었소, 하는 소식만 들어도 괜히 흐뭇해질 때가 있지요. 좋아요라도 주고 받으면 금상첨화이고 적절하겠습니다. 저는 생일이란 것은 이 정도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연말도 그렇습니다. 삶의 현황이나 의미와 태도를 종합적으로 환기하는 데에 적당한 기회인 것이 바로 일년에 한 번 찾아오는 연말인 것입니다.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은 많은 사람들이 목표를 이야기합니다. 올해의 목표를 점검하고, 신년을 맞아 목표를 세우고, 내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이 걸음이 과연 잘 되어 가는 것인지 고민합니다. 계획적이건 아니건, 의식적이건 아니건, 주도면밀하건 아니건, 많은 사람들이 그러곤 합니다. 그런데, 정말 삶에 목표가 있을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환상이라고 단언하고 싶습니다. 가령 삶의 목표가 애 둘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라고 하면은, 핏덩이 둘째가 세상 빛 보고 응애 하는 순간 크레딧이 올라가나요? 그 다음 목표를 세워서, 뭐, 건강하게 잘 키우고 나도 노후 준비 잘 해서 전원 생활 하기로 마음먹으면, 장성한 자식들이 보태준 돈으로 꾸린 농촌 가옥에 입성하는 순간, 감동적인 배경 음악이 잔잔하게 깔리면서 페이드 아웃 되나요? 삶의 결착은 우리가 아는 한 필연적이며 항구적이고 비가역적인 죽음, 그것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가 목표라고 일컫는 것들은 그 결말을 못 본 체하기 위해 애써 쳐둔 암막 커튼입니다.

그냥 다 죽자, 목표고 뭐고 때려치자, 전부 불태우고 똥이나 퍼먹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목표를 세우고, 좇고, 달성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독하게 재미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이 삶의 느슨하거나 팽팽한 이정표로서 기능하기에는 흔히들 생각하는 것보다 모자란 부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은 산꼭대기를 올려보며 나아가는, 성지를 향하여 경건히 순례하는, 지도를 펼치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머나먼 황금향을 찾아 노를 젓는, 그런 여정이 아닙니다. 와본 적 없는 황야에 벌거벗은 채 내던져진 것이 모든 인간의 처지이며 그곳에서 방황하는 것이 인생의 실체입니다. 내가 어쩌다 이곳에 이르게 되었는지 조금의 단서도 없이, 언젠가 먼 훗날 검은 옷의 신사가 찾아와 꺼내줄 때까지, 이 생경한 객지에서 내 한몸 부지하는 것이 한 문장으로 압축한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그럼 인간은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목표도 없다, 때려칠 수도 없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야 할까요. 우리의 처지가 어떤 처지인지 곱씹어 상기하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도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에 무슨 존재였는지, 존재이기는 했는지, 아무것도 명확하게 아는 바가 없습니다. 분명히 아는 것이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태어났다는 점입니다. 가정 환경과 성장 배경은 어떤 것일지, 나에게 무슨 일들이 다가올지, 세상이 어떤 이치로 흘러가는지, 이것은 고를 수도 없을 뿐더러 사전에 알 수도 없는 일들입니다. 사람이 존재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노여워하고, 기대에 부풀었다가, 실망하고, 다시 또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환희에 차는, 그런 일들이, 넌지시 살피면 얼마나 가여운 일인가 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모든 단면에는 가만 보면 딱한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면 측은지심도 수오지심도 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발하는 판단과 직감을 따르면 된다고, 인간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저는 자못 주장하고 싶습니다.

선인과 악인, 적과 친구, 위인과 범인, 이웃과 외인, 타인을 구분하는 방식에는 셀 수도 없이 다양한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나눈다고 하더라도 저는 어느 누구도 부조리에서 오는 부당한 불행을 겪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원수가 불행을 겪더라도 제 꾀에 넘어가야 옳지요. 부조리란 무엇이냐, 세상 만사 도처에 가득한 것이 부조리입니다. 분쟁 지역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은 부조리입니다. 시력이 낮다는 이유로 정보화의 혜택을 보지 못하는 것은 부조리입니다. 수사 기관의 실적 만들기에 걸려들어 무고한 죄를 뒤집어쓰는 것은 부조리입니다. 부모의 헛된 신념과 믿음으로 꿈을 펼치지 못하는 것이 부조리입니다. 식량이 썩어넘치는 과잉의 시대에 누군가는 식사를 걸러야 하는 것은 부조리입니다. 심지어 누군가에게는 마찰력이나 중력 같은 것들까지도 부조리일 수 있습니다. 끔찍하고 글러먹은 이놈의 세상이 부조리로 가득한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이치에 맞고 맞지 않는 것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종은 좀처럼 만족하는 바가 없으니, 마음과 생각이 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부조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고 세상을 씩씩하게 헤쳐나가기로 마음먹는다면 그것을 말릴 권리도 솜씨도 요량도 제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조리의 엉킨 타래를 풀어헤치는 데에는 직접 기여하는 바가 없을 때가 잦으며, 만약 그러한 태도를 남에게 강요하는 개인이 있거나 심지어 전방위적인 사회의 압력이 있다면 그것은 아주 심각한 또 하나의 부조리입니다. 우리는 부당한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채 태어나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처지입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친구, 사랑하거나 미워했던 사람들, 가깝고 멀었던 사람들, 친한 사람들, 낯선 사람들,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서로 영영 모를 사람들까지도, 그것 하나만큼은 모두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합니다. 도무지 말이 되는 구석이 하나 없는 이 종신형을 받아버린 같은 처지에,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합니다.

저는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제 자리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을 해왔으며, 제 자리에서 할 수 있을 일을 할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거나 혹은 욕구를 채우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몹시 게으른 사람이라 화장실 가는 것도 종종 미루곤 합니다. 영영 미루진 못합니다.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에는 가고 맙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끝도 없이 안 가고 버티고 있으면 별로 원하지 않는 상황이 펼쳐질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난장판이 벌어질지 예상이 되고 그것을 정리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않아도 괴롭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이유도 하나입니다.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 않으면, 지저분하고 원하지 않는 광경이 펼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한 예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지켜볼 간수도 탈옥할 바깥도 없는 이 무간지옥에서 모두의 괴로움을 덜어낼 수 있는 선택은 분명합니다.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 문제에서는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공멸로 이어지지만 상당 부분이 우리의 실제 세계와 다른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론 속의 존재가 아니고, 우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최선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짓지 않은 죄로 원하지 않는 징역을 사는 이들은,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