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인리스 연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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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뎅, 스테인리스, 정확히 말하자면 스테인리스 스틸 내지는 스테인리스강 제품에 대해 국내에서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정보가 있다. 제품을 세척하지 않고서는 검게 묻어나오는 연마제가 남아 있으며, 이는 탄화규소로 발암 물질에 해당하니 반드시 제거하고 사용하라는 것이다. 흉악한 발암 물질이 규제 대상이 아니라 소비자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푸념도 흔하다.

과연 사실일까?

국내에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출처가 불분명한 채로 틀린 정보가 유통되는 경우가 상당히 잦으며, 개중에는 국내에서만 유통되는 것들도 상당수이다. 선풍기 괴담이 대표적이다. 이 연마제 발암설 또한 비슷한 기운을 느껴 이래저래 찾아보게 되었다.

이 연마제가 발암성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자료들에는 거의 모두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소수가 제시하고 있는 것이 IARC에서 2A급으로 지정했다고 하는 것인데, 해당되는 자료는 나노 소재와 섬유인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직업 상 노출(occupational exposure)의 영향이다. 또한 분진(dust) 및 섬유(fibres and whiskers)의 형태로 된 것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연마제와 같은 하류 산업의 경우 노동자들이 섬유에 노출되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no evidence that workers producing or using abrasive materials were exposed to the fibres)고 정리하고 몇 없는 관련 연구 또한 평가할 사항이 없는 것으로 판단(not considered to be relevant for the evaluation)하는 것 같다. 일반 소비자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한 언급은 내가 찾지 못했거나 아예 없다. 의료 용어가 많아 쉽게 읽히지 않지만 대부분 호흡기나 폐를 통한 노출에 대해 논하는 것 같은데, 한 페이지 정도의 분량이 복강 내 주입(Intraperitoneal injection)에 관한 연구를 다루고 있다. 놓쳤거나 잘못 읽은 거라면 작은 비극이지만, 암만 봐도 일관적으로 탄화규소 산업 노동자들주로 섬유 형태흡입한 경우에 폐암과의 연관성을 말하고 있다. 위암이 적게 언급되기는 하나 노르웨이 사례에 관한 연구에서는 근거가 제한적이라 위암에 대해 영향이 불분명하다(questionable)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연마제 괴담은 국내에서만 통용되고 있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최소한 영어 웹에서는 스테인리스강 제품을 구매한 후의 지침 및 탄화규소의 발암성에 관한 내용이 일반 소비자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발암물질인 탄화규소를 스테인리스강 제품에서 제거한 후 써야 하냐는 질문에, 철썩같이 믿을 친구는 못 되지만서도 ChatGPT가 한국어 질문에는 다소 전반적으로 긍정하는 답변, 영어로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며 위생 등을 고려해 씻어서 나쁠 건 없다는 답변을 내놓는 것은 시사하는 점이 있어 보인다.

그러니까 내 판단은 탄화규소 산업에 종사하지도 않고 스뎅 상품에 코를 들이박고 숨을 들이쉬는 취미가 없는 한 발암성 물질이라는 무시무시한 표현에 치를 떨며 스뎅 상품을 살 때마다 베이킹 소다니 식초니 하는 것을 들이부으면서 정부를 저주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스뎅 제품에는 연마제로 사용된 탄화규소가 있으며 탄화규소는 발암물질이기 때문에 이를 제거한 후 사용해야 한다는 이 주장은 틀리다고 밝혀진 바가 없지만 맞다고 볼 뚜렷한 증거도 마찬가지로 없다. 나는 연마제 괴담이 검은 색깔이 인류 문화에서 표상하는 일반적인 느낌, 한국인 특유의 과하다 싶은 건강염려증, 국내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오정보의 통용이 결합되어 낳은 하나의 해프닝 정도라고 생각하기로 잠정적으로 생각 중이다.

사실은 탄화규소라는 전제부터 재고해야 할 수도 있다. 식약처 소속 연구관이 연마제로 다른 물질이 사용된다는 내용을 밝힌 바 있고,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는 국내의 경우로 한정하여 보다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대규모 소송을 감수하면서 검은 음모를 펼치기로 업계가 단합한 것이 아닌 다음에야 상식적으로 소화기를 통해 섭취했을 때 인체에 발암을 일으키는 것으로 확인된 물질이 규제 없이 식기에 묻은 채 제조 및 유통되는 일이 이만큼 제도를 갖춘 나라에 손쉽게 용인되기는 힘들다.

암이 걱정된다면 자외선, 튀김과 가공육, 적색육을 피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탄화규소가 무섭거든 섬유를 들이쉬지만 마시라. 동시에 근거가 불명확한 주장은 피하시거나 최소한 재생산을 멈추길 간곡히 부탁드린다.